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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운동은 약 1300년경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시작된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를 부흥하려는 운동입니다. 르네상스 운동은 그 후 약 300여 년 동안 지속되어 서유럽 국가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어의 리나시멘토를 어원으로 하는 재생이나 부활, 부흥을 뜻하는 프랑스어입니다. 리나 시 멘토를 최초로 사용한 것은 미술평론가이자 화가인 조르보 바사리(Giorgio Vasari 1511-1574)입니다. 프랑스에서 르네상스가 현재의 의미와 같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800년대입니다.
르네상스와 휴머니즘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로마시대는 그리스 철학자 프로타고라스의 기술에서 보듯 인간이 만물의 중심이자 척도이며 휴머니즘이 중시된 사회였습니다. 이후 기독교 세력이 강해지고 교회의 권위가 커지면서 휴머니즘은 자취를 감추고 교회의 권위만 커져 갔습니다. 르네상스 이전의 중세에는 십자군의 원정으로 기독교가 세력을 확장하였고 12세기에 교황의 권력은 정점에 달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는 사람이 세상의 중심이 아닌 기독교와 교회가 세상의 중심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르네상스 운동은 당시의 기독교나 교회 중심의 문화와 역사를 그리스 로마 시대와 같이 인간을 중심으로 한 시점으로 되돌리려고 시도한 운동입니다. 하지만 르네상스 운동은 기독교를 부정하는 것을 아니었으며, 르네상스의 예술은 인간미를 되찾으면서 때로는 교회를 후원자로 삼아 다시금 휴머니즘을 꽃피우게 됩니다.
그림이나 조각의 모양이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많으며,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벽화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그림이 있는 밀라노의 산타 마리에 델체 그라치에 성당 같이 성당이나 교회 같은 종교시설물에 전시된 것이 그 예입니다.
르네상스 운동은 단기적인 문화부흥 운동이라기 보다는 더 큰 조류와 같은 것으로 수세기에 걸쳐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갔습니다. 르네상스 운동이라는 말은 좁은 의미에서는 이탈리아의 문예 부흥운동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휴머니즘에 대한 재발견이라는 의미로 쓰일 수 있습니다. 이 시대의 이탈리아와 독립적으로 발생한 예술혁명도 '북유럽의 르네상스'라고 부릅니다. 이때의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복고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르네상스가 일어난 이유 4가지
1. 교황의 몰락
1096년 시작된 제1차 십자군 원정의 성공으로 교황의 권력은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하지만 이후 아랍이 뭉치기 시작하면서 십자군 원정은 대부분 실패한 원정이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황제와 교황 사이에 권력 다툼이 격화되면서 점차 교황의 권력은 그 힘을 잃고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1302년에는 필리프 4세와 로마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가 대립하여 산간지역 아나니로 피신한 교황을 프랑스군이 나포하는 아나니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는 21일 후에 사망합니다. 이 사건부터 결정적으로 황제가 교황에 대해 우위성을 가짐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1309년 프랑스 왕 필립 4세는 새 교황 클레멘스 5세를 압박하여 교황청을 로마에서 남프랑스인 아비뇽으로 옮겼습니다(아비뇽 유수). 이를 통해 필립 4세는 자신의 슬하에서 교황을 감시할 수 있고, 동시에 교황에 대한 황제의 우위성을 강하게 어필할 수 있게 됩니다.
2. 동방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과 자치도시 발전
십자군 원정의 결과, 유럽과 동방지역의 무역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북이탈리아는 유럽과 아시아의 중계무역의 거점도시로 부각되며 베네치아(Venice)나 제노바(Genoa)와 같은 항구도시와 모직물을 주산업으로 하는 피렌체(Florence) 등에 부가 집중되었습니다. 특히 동방과 지리적 연관이 강한 이탈리아는 동방의 금값보다 비싼 후추 등의 향신료를 유럽에 독점 판매하여 막대한 부를 얻기 시작합니다.
당시 유럽 병사들은 대부분 용병이었기 때문에 부는 병력의 숫자와 질과 직결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들 도시에서는 상인들이 용병을 고용하기 시작하면서 정치적 힘을 가지게 되었고, 피렌체처럼 큰 자치권을 가진 자치도시가 형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이탈리아의 자치 도시에는 동방무역의 부를 배경으로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된 일족이 출현 하였 습니다. 이러한 집안에는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과 스포르차 가문, 페라라의 에스테 가문, 만토바의 곤차 가문이 있었습니다. 이 일족들의 금전적인 지원으로 르네상스 예술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3. 오스만 제국의 비잔틴 제국(콘스탄티노플) 침공
13세기 말 비잔틴 제국의 동북부지대(현재의 터키 주변)에 오스만 1세가 이끄는오스만 국가가 출현했습니다. 오스만은 급속히 세력을 확대해 1300년 초 현 터키, 아테네, 아라비아 반도를 아우르는 제국으로 커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오스만이 비잔틴 제국을 침공하면서 발칸 반도 국가들을 차례로 무너트리게 되었습니다.
1389년 무라트 1세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군은 발칸반도 국가 연합군과 싸워 압승했습니다. 1396년에는 원정해 온 마지막 십자군을 니코폴리스에서 무찌르고 1453년에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삼중 성벽이 함락되어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과 콘스탄티노스 대제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수천년 지속될것 같은 비잔틴 제국의 몰락으로 그리스에 있던 학자들의 상당수가 난민이 되었습니다. 학자들은 서적과 역사적 가치가 있는 문헌들을 가지고 부유한 이탈리아로 건너가 무역으로 부를 얻은 후원자들에 힘입어 어학원을 설립해 로마와 그리스의 고전 문화를 유럽으로 확산시켰습니다.
이탈리아에는 로마시대의 유적이 다수 존재합니다.그 러한 유적과 새롭게 유입된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문화는 이탈리아의 문화인들을 촉발시켰고 인본주의적인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4. 십자군의 원정으로 인한 동서문화의 충돌
1096년 성지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대의하에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십자군을 조직하여 현재 터키지역인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장악한 셀주크 제국(이슬람교도)으로 원정시켰습니다. 여러 차례의 십자군과 이슬람교국과의 충돌은 유럽에 이슬람 문화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 문화와 접촉할 기회를 가져왔습니다. 십자군 원정은 1100 - 1200년대에 걸쳐 10여차례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처음의 성공을 끝으로 대부분 실패로 끝나면서 유럽의 기독교들도 몰락하기 시작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교황청이 아비뇽 지역으로 옮겨 70년 정도 이어져 7명의 교황이 아비뇽을 배경으로 활동 하였습니다. 그후 1377년 최후의 아비뇽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는 아비뇽에서 로마로 교황청을 이전합니다. 그러나 이전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로마의 교황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결과 로마와 아비뇽 양쪽에 교황이 서는 이례적인 사태에 빠지면서 교회는 둘로 분열되었고 그 세력은 더욱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황의 권위의 쇠퇴는 기독교의 영향력을 저하시켰습니다.
위의 4가지 상황에 의해 교황과 기독교의 영향이 줄어들고 그 틈새를 메우듯 비잔틴제국과 오스만제국에서 유입되어온 고대 그리스 로마의 문화가 이탈리아로 침투하였습니다. 더불어서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부유층이 그 흐름을 지지하여 문예의 강력한 후원자가 된 것이 르네상스 운동의 부흥으로 이어졌 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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